statement 2
INTERACTION
윤 유 진
statement 1
INTERACTION
인간존재의 불안과 자유에 대한 성찰을 위하여 과거 기억에 대해 탐구하고, 과거 기억에 대한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하여 ‘INTERACTION(상호작용)’을 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과거 기억을 갖기 위해서는 경험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 경험을 베르그송의 ‘지속’과 우리의 살아감에 있어 얻을 수 있는 ‘순수 기억’과 연결시켜 작업한다. 지속을 위해서는 기억과 시간이 혼재 되어야지만 가능하다. 베르그송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지속’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 안에서 존재함을 말한다. 이 변화가 바로 ‘지속’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야지만 기억을 가질 수 있고, 기억을 하기 위해서 경험을 해야한다는 것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과거의 것이고 현재의 것은 지나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경험 속에서 지속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에 집중한다.
이를 토대로 나의 작업은 항상 과거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과거 기억은 언제나 다른 것들과 연결이 된다. 예를 들어, 시간, 지속, 순수 기억, 경험 등이 그러하다. 과거 기억 속에는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있다. 이러한 일상의 경험이 없었다면, 즉 일화 기억이 없었다면 나의 작업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 기억으로부터, 그 사실로부터 선택되어진 이미지를 개인적인 생각으로 각색하고 이미지화 시킨다. 왜냐하면 그 과거 기억은 사실이 아닌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석되어진 조각조각 흩어지는 기억의 끝을 화면 혹은 공간에 집약시켜 표현한다. 그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미지와 색채를 찾아 재구성한다. 구체적인 장소나 대상의 재현이지만 그로부터 벗어나 상상과 추상이 작동된다.
경험속에서도 불안은 언제나 존재한다. 이러한 불안은 비단 나만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안하지만 자유를 얻고자 하는 우리의 양가적인 모습 속에서 인간존재의 불안과 자유를 성찰하기 위한 고찰이기도 하다. 존재한다는 것과 과거 기억과의 부딪힘을 통해 정체성을 탐구한다. 이러한 인간존재의 불안과 자유에 대한 성찰을 하기 위해 과거 기억을 어떠한 방식으로 시각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윤 유 진
우리는 시간안의 존재로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시간 속에 산다는 것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경험한다는 것은 기억을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은 경험의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을 한다. 우리의 기억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간은 흘러감으로 기억은 ‘과거 기억’이 된다. 그 과거 기억 없이,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이러한 우리의 기억은, 영상처럼 이미지화되어 우리 뇌의 깊숙한 곳에 저장된다. 본인의 작업은 일상을 하루하루 습관처럼 살아가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한다. 일상 속 그 시간들 속에 기억들이 좋았던 기억이든, 나빴던 기억이든.
경험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빼놓을 수 없다.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말은 ‘변화’안에서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 변화를 ‘기억’하는 것이 바로 ‘지속’한다는 것이다.기억은 현재나 미래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현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순간도 과거이고,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건을 기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언어, 관계 또는 개인적 정체성을 배우거나 발전시킬 수 없다. 그 어떤 기억이라도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 등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또 다른 느낌의 생생한 기억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장이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되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인지될 때는 주로 기억과 관련된 대상의 소멸 혹은 상실로 인해 그 부재를 인지할 때이다. 그것들이 특정 대상의 소멸로 인한 상실감이, 역설적으로 그 대상과의 기억을 특별하게 인지하여 다른 기억과 차별화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종종 ‘불안’을 야기하기도 한다. 특별하게 인지된 기억은 다른 기억과 그 구성 매체, 예를 들어 동일한 장소나 동일한 사물로 구성되었다고 하더라도 본인에게 있어서는 다른 것과는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인지된다는 것이다.
집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잊혀져가는 기억에 대한 ‘망각’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본인은 ‘망각’이라는 것 자체가 이루어져야지만 우리의 머릿속에도 또 다른 기억이 들어설 공간이 마련된다고, 그러므로 망각은 정상적인 것이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망각된 기억들은 머릿속 깊은 곳에 있다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슬며시 떠올라 회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본인이 고민하고 있는 지점은 회상의 지점이 아니다. ‘망각’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전적 정의에서처럼, 어떤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 ‘망각’일까? ‘망각’의 정의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실을 잊는다는 것은 기억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다.
그 기억으로부터, 그 사실로부터 선택되어진 이미지를 개인적인 생각으로 각색하고 이미지화 시킨다. 왜냐하면 그 과거 기억은 사실이 아닌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석되어진 조각조각 흩어지는 기억의 끝을 화면 안에 집약시켜 표현한다. 그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미지와 색채를 찾는다. 그것은 늘 보았던 익숙한 이미지였을수도,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갔던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이미지를 선택함에 있어 강렬했던 느낌의 기억에서 끌어낸다. 그러한 기억 속 이미지의 장면을 환기하면서 재구성 한다. 구체적인 장소나 대상의 재현이지만 그로부터 벗어나 상상과 추상이 작동된다.
또한, 본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삼각형의 의미는 ‘불안’의 상징으로서 나타난다. 삼각형은 역사 전반에 걸쳐 시각 예술에 사용되어온 구성요소이다. 흔히 삼가형의 모습은 피라미드 형태로 생각하기 쉽다. 본인의 작업에 있어서의 삼각형은 피라미드 형태가 아닌 역삼각형을 작품에 응용하고 있다. 피라미드 모양의 삼각형은 단단한 기초를 통해 땅에 뿌리를 내리는 형이다. 강한 기초나 안정성을 나타낼 수도 있다. 또한, 이 삼각형은 영적 세계로의 상승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역삼각형을 생각해보자. 역삼각형은 물리적 세계로서의 강하를 나타낼 수 있다. 기호는 기의와 기표가 연합하여 만들어진다. 본인은 추상적 관념이라고 볼 수 있는 과거 기억을 기의로 놓고, 이 의미의 운반체인 삼각형을 기표로 놓아 또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기호를 형성한다. 물론 삼각형 자체를 기호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의미의 기호를 상징하는 것이다. 삼각형 자체를 기호로 보는 것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기호를 말하는 것이고, 본인의 작품에서는 기의와 기표가 연합하여 생기는 기호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렇게 본인의 작업에서는 섬세하고도 정교한 겹겹의 층들을 쌓고 덮는 행위에 대상에 대한 하나의 물감이라는 물질을 이용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하학적 기호들, 예를 들어 삼각형이나 사각형 같은 기호들의 유기적인 형태 또는 평면적인 추상문양, 재현적인 묘사에 해당하는 부분이, 화려하고 장식적인 원색들이, 실제 그 때의 기억에 연유한 것과 본인 자신의 자의식의 표출된 부분들이 섞여 있다. 또한, 의식에서 건너온 것과 무의식에서 부각된 부분들이, 그 경계를 허물고 상호 작용하면서 하나의 유기적인 형태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일정한 모양과 방향의 기하학적 기호들의 집적이 대상에 대한 색채적 감각에 가까워지기 위한 불안의 수행적 과정의 시간성을 담고 있으며, 집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잊혀져가는 기억에 대한 은유라 볼 수 있다. 본인은 우연성과 물성의 상관관계를 재검토하여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데 목적을 둔다. 재료 자체가 갖는 ‘물질성’을 환기시키면서 화면의 마띠에르를 강조한다. 때로는 잔잔하고 고요하게 조화와 균열을 반복한다. 그 반복의 시간을 일상 속 습관, 기억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essay
작업에 대한 에세이
윤 유 진
INTERACTION. 작품에 붙이는 제목이다. 이는 학부시절부터 십수 년동안 이어지고 있다. 글쎄, 왜일까?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과 인터랙션(interaction) 사이에서 굉장히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당시에는 기호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물론, 현재도 기호들에 관심이 있고, 기호를 사용하고 있지만, 커뮤니케이션과 인터렉션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 때의 나는 기호를 기호 날 것, 정말 날 것 그 자체로 표현하곤 했다. 알아볼 수 있는 대상들에 직접적으로 표현하던 기호들. 기호들이 가득한 세계 안에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고, 우리의 모든 삶 속에 인간 각자가 기호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과 상호작용하며 소통을 통해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호의 인식 없이는 살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으며, 어떠한 다른 것들을 의미있게 나타낼 수 있는 요소로서 그 대체물이 되는 것을 기호라고 생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지만 나뿐만 아니라 우리는 무언가 상호작용하고 있고, 또 소통하고자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런 고민 끝에 내려진 작품 제목이지만, 간혹 작품과 제목(주제)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던 그 때의 작품들과 비교해서 지금은 추상적인 패턴, 그 사이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실루엣으로 표현된 형상들을, 타자가 단편적으로 바라본 내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커뮤니케이션은 연락을 주고받는, 소통하다는 뜻을 가진 반면 인터랙션은 조금 더 미묘한 느낌을 준다. 상호 작용, 상호의 영향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가 가진 본연의 뜻은-여기서 본연의 뜻이란, 영영 사전의 뜻을 직역한 것을 말한다- 조금 더 심오한 느낌을 준다.
“our experience of informal social interaction among adult”
본질적인 interaction의 뜻에는 ‘experience(경험)’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나 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경험’ 없이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자체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이 있음으로 우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보편적으로 경험이라고 하면 일상적인 것은 배제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고 나는, 그리고 우리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의 특별했던 경험은 무엇이었니?” 라고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석사를 마치고 홀연히 떠났던 1년간의 런던에서의 생활, 또 박사학위 취득 후 혼자 떠났던 태국 여행이었고, 그 태국 여행에서 바다를 싫어하는 내가, 준비에 준비를 해가지고 의도적으로 경험을 위해 도전한 스노쿨링이 그러했고,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 타지 않았던-심지어 탈 수 있는지도 모르고 도전했던- 45km의 자전거 투어가 그러했다(물론 최근의 ‘특별했던 경험’을 나열한 것이다). 한 사람의 특별한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삶 속 곳곳에서 묻어나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모든 것 또한 매 순간 자각하며 살지는 않더라도 경험의 한 부분이라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일상을 예로 들어보자면, 나는 매일 아침에 9시쯤에 눈을 뜨고, 오전 10시~12시 사이에는 작업실을 나온다. 그리고 밤 11시~1시에 집에 간다. 작업하기 싫을 때도, 전시가 없을 때도, 그냥 작업실에 간다. 뭔가 굉장히 오래된 습관적인 것이다. 나에겐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평일과 주말, 날짜의 경계도 없다. 그렇게 매일 집과 작업실을 오고 가는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별 생각 없이 다니는 것이 대부분일 테고 그것을 ‘경험’이라고 인지한다는 것조차 이상할 정도이다. 하지만 그러던 나날중에도 어느 날은 매일 오고 가는 그 길에 사고가 난다거나 하는 평소와는 다른 일들이 벌어질 수도, 또 어느 날은 운전하다가 문득 본 하늘이 예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실제로 간혹 이런 감정을 느끼고, SNS에 업로드를 하거나 일기를 쓰기도 한다. 그 날의 상황에 따라,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일상적인 그 길이 나에게 다른 느낌의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있어 어느 날의 경험으로, 또 하나의 ‘기억’으로 저장되어 예상하지 못한 순간, 상기하게 되고 회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쌓이고 쌓여 문득, ‘특별한 경험’으로 훗날 회상 혹은 추억할 수도 있다. 너무나 유명한 비유지만, 마치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을 통해 상기하게 되는 어린 시절 콩브레에 대한 기억처럼,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기쁨을 느끼게 하는 비의도적 기억이 아닐까 싶다. 차에 적신 마들렌 맛이, 우연하게 과거에 차에 적셔 먹었던 맛을 되살리면서 기억을 일깨워주고, 우연한 회상을 통해 과거의 온갖 추억을 되살려주는 것 말이다. 프루스트가 이전에 겪었던 경험을 통해, 과거의 순간들을, 주체를 현재의 의식 속에서 되찾으면서, 해체와 소멸을 통하여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을 이미지화하여 찾아가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경험은 시간의 통과이다. 우리는 시간안의 존재로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말은 ‘변화’ 안에서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 변화를 ‘기억’하는 것이 바로 ‘지속(dureé)’한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기억은 같을 수 없다. 이 말은 우리가 시간 속에 존재하며 경험한 것들이 과거 기억이 되고, 그러한 기억이 ‘지속’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통과한다는 것 자체가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경험한다는 것은 기억을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과 기억은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우리의 기억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감으로 기억은 ‘과거 기억’이 된다. 그 과거 기억 없이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순간은 계속해서 과거로 흘러간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 위치하며, 우리의 모든 사유 역시 어떠한 과거의 경험으로 인한 도출일 것이다. 기억과 시간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그저 기억과 시간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 순간은 미래를 만나는 즉시 과거라는 세계가 되어 버린다. 시간은 한 순간의 찰나가 아닌, 일정한 두께를 지닌 지속되는 흐름이다. 지나간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과거는 더 이상 그 순간이 아닌 현재에서 재해석되어진 새로운 기억이 된다. 기억은 그러한 시간 속에 이미지화되어 보존된다. 조금 전 벌어진 순간의 기억과 아득한 과거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순수 기억-순수 기억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겪어온 개인적 체험 전체를 의미한다-의 형태로 저장된다. 상호작용하고 있는 경험과 기억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며, 이는 작품 제작에 있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잠재적으로 순수하는 순수 기억을 더듬는다. 이렇게 재해석된 기억은, 영상처럼 이미지화되어 우리 뇌의 깊숙한 곳에 저장된다. 기억은 당연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각조각 나뉘어지고 흩어진다. 시간에 따라 새로운 기억을 얻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 삶에서 얻어지고, 얻어질 수 있는 이러한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형되고 축적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기억은 덧없이 사라졌다가 불현듯 되살아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불완전하며 희미해진다.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소멸되기도 하고 다른 외부 자극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변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억은 무의식속에 숨어있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 순간적으로 떠오르기도 하는 등 그 모습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기억의 단면으로 저장되는 이미지가 아닌 시간을 가지고 움직임이 있는 이미지이다. 재해석된 기억은 사실을 왜곡하며 재구성되기도 하는 등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식과 관계를 맺어, 기억을 무의식의 의지가 반영된 산물이라 여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거 기억’만이 지금의 나를, 내 작품을 구성하는 것일까? 이 문장 앞에서 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만일 우리가 기억하는 그 과거 기억의 그대로가 우리 자신이라면, 우리에게서 자유라는 것이 남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결정론에 반발하면서도 한편으로 나의, 우리의 일부를 구성해준 것이 과거 기억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한 존재적 연속성, 안정스런 정체성을 보장해주는 과거, 그 과거의 산물들 중 하나가 내가 되고, 우리임도 인정할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물들의 많은 부분들을 설명하게 해주는 양면성의 논리를 떠올릴 수 있다. 과거가 이 양면성을 정확히 가지고 있다. 때로는 무거운 짐처럼 우리를 잡아 끌기도 하고 때로는 자유롭게 앞서가도록 바라봐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을 육화한 경험들, 과거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어 준다. 우리의 정체성은 시간 경과에 따라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이 과거에 기대고 있다는 것, 빚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과거를 이루는 기억들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기억은 과거에서 현재로 유연히 넘어 온다. 우리가 기억에 대해 갖는 어설픈 태도들. 가령, 기억해야할 것은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하는 것은 기억하는 우리를 부정할 수 없다 해도 나에게, 우리에게 기억이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기억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는 분명하게 있는 것이다. 기억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였는지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의 양이 방대하거나 얼마만치 깊이 새겨질 만큼 결정적이었던가,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어쨋든 기억을 마주할 때 기억을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였던가를 확인하고 ‘아는’게 중요한 것이다. 과거란 기억과 추억 그리고 사건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도 그런 사건들, 기억들의 집합체인 과거라는 틀을 따라 일정 부분 써내려가는 것이 사실이다.
기억들의 집합체인 과거라는 틀을 장소에 빗대어 작품에 표현하고 있다. 예전의 작품에서는 인물이나 물체 등 표현의 범위가 다양했다면, 현재의 작업에서는 어떤 장소, 도시나 풍경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장소는 시간과 서로 상호작용하고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아서 단토(Arthur Danto)가 <브릴로 박스>에 인쇄된 일상적 이미지에 의미를 두었듯, 팝아트의 상징적인 방식으로 기억 속 풍경을 재현(re-present)한다. 이러한 팝아트적인 형태는 학부시절부터 즐겨 쓰던 방식이다.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방식이기도 했지만, 화면을 꽉 채우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구에 팝아트적 묘사방식은 잘 부합했다.1) 내 작품의 주제인 interaction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종권의『마르셀 프루스트의 문학세계』에 따르면, “가령 친숙한 어떤 장소가 때로는 우리들을 버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장소는, 다시금 돌아와서 우리를 만나주고, 커다란 위안을 가져다 주며, 그 본래의 위치를 다시 차지하는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장소는, 마치 과거의 순간이나 회상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장소는 떠나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는 장소가 공간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공간이라고 하면 우리는 어떠한 장소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장소는 통상적 의미의 장소와 또 하나의 장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소는 우리에게 있어 다른 세계처럼 보이게 만들어줌과 동시에 아름답게 보이게도 한다. 그곳에는 뚜렷이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것이 있고, 어떤 장소보다도 개성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간과 공간은 장소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진다. 장소는 특정 풍경, 건축 양식의 표면적인 외양보다도 훨씬 깊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2)
또한 공간은 캔버스의 공간이 될 수도, 장소가 될 수도 있다. 두 가지 공간은 그 어떤 것일지라도 나에게는 시각적인 공간으로 다가온다. 캔버스에 표현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설치나 영상 작품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 공간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나를 비롯하여 그 누구라도 어떠한 과거 기억의 한 장면을 회상했을 때, 기억을 모두 뚜렷하고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는 없다. 기억은 언제나 재해석되고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기가 발명되었고,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포착하여 사진으로 찍는다. 일반적인 사진들은 직접적 순간의 흔적을 대변할 수 있는 이미지이다. 이러한 사진이라는 매개 이미지는 리얼리티와 은유와 상징으로 재형상화하는 추상 이미지에 속한다. 다양한 시간 속 기억의 흔적, 그 안에 추상의 모습들이 있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사진’을 기록의 도구로 사용해왔다. 특정한 그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으로써 기록을 한 것이다. 과거 기억을 이미지-기억함으로써, 표상시키는 것으로부터 기록을 시작한다. 그 과거 기억으로부터 선택되어진 이미지를 개인적인 느낌으로 각색하고 이미지화 시킨다. 왜냐하면 그 과거 기억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닌 ‘해석’되어진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석되어진 이미지를 화면 안에 재구성하고, 집약시켜 표현한다. 캔버스라는 또 하나의 공간에 표현할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공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인위적인 추상성을 내포시켜 표현한다. 추상적 공간이라는 것이 가상 공간을 지칭하기 위한 것임을 감안했을 때, 나에게 공간은 지속의 흐름을 통한 과거 기억과 유사하며, 그것들은 그 안에서 또 다른 공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나는 대체로 캔버스라는 2차원적인 공간에 유화 물감을 사용한다. 왜냐하면 유화는 그려진 대상들이 색상과 질감, 온도를 지니고 있으며 하나의 공간을 차지하고, 나아가 전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3) 그리고 그 공간안에 기호들이 있고 섬세하고도 정교한 겹겹의 층들이 있다. 그 층들을 쌓고 덮는 행위에 대상에 대한 하나의 유화 물감이라는 물질을 이용해 표현한다. 기하학적 기호들, 예를 들어 삼각형이나 사각형 같은 기호들의 유기적인 형태 또는 평면적인 추상 문양, 재현적인 묘사에 해당하는 부분, 화려하고 장식적인 원색들, 실제 그 때의 기억에 연유한 것에서 부각된 부분들이 그 경계를 허물고 상호 작용하고 소통하며 하나의 유기적인 형태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일정한 모양과 방향의 기하학적 기호들의 집적이 대상에 대한 색채적 감각에 가까워지기 위한 수행적 과거의 시간성을 담고 있으며, 집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잊혀져가는 기억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물감이 만들어 내는 우연성과 물질성을 환기시키면서 화면의 마띠에르를 강조하는데, 이것이 때로는 잔잔하고 고요하게 조화와 균열을 반복한다. 그 반복의 시간을 일상 속 습관, 기억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에 대한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수 많은 고민을 해왔고, 앞으로도 수 많은 고민을 해야한다. 타자에게 내 작품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추상성이 가미된 작품은 관람객이 종종 어렵게 느끼기도 때문이다-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작품이 하나의 텍스트가 되어 읽혀지고, 기호가 되어 타자와 상호작용하며 소통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작가로서 나 자신이 욕심을 부리는 일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는 작업을 하면서 어렵게 가장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반복되는 작업과정 속 그 과정을 영상물로 제작하여 소통하려는 노력과-구독자는 없지만 유투브에 작업과정을 아카이빙을 하고 있다- 작업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브제(시트지)들을 통하여 설치 작품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 등 표현 영역을 확장시켜 상호작용하여 소통하려는, <INTERACTION>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1) 허나영, 윤유진의 개인전 <INTERACTION2>(2016), <INTERACTION3>(2019) 도록 평론 발췌.
2) 진 로버트슨•크레이그 맥다니엘, 『테마 현대미술 노트』 , 문혜진 옮김(두성북스, 2013), p.174.
3)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최민 옮김(열화당, 2012), p.104.